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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관련/재즈 이야기

6. 1940년대 : 비밥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스윙은 거대한 기업이 되었다. “유사이래 가장 대규모의 음악 비즈니스”라고들 한다(그 당시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음악 비즈니스 차원에서 보면 1930~40년대의 음반 판매량은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다). 스윙이란 말은 담배에서 여성 의류에 이르는 모든 종류 상품의 마케팅 수단이 되어버렸다. 동시에 그 음악은 일반적인 상업적 수요에 순응하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부한 표현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스타일이나 연주법이 너무 상업화될 때면 재즈에서 흔하게 있는 일처럼 역방향으로의 진화가 일어났다. 모두 다 신중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표현 욕구를 가진 일군의 뮤지션들이 일반적인 스윙의 유형에 진지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음악은 처음에 캔자스시티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로 할렘의 음악인들 집합소(특히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장소)가 중심이 되었다. 새로운 10년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기존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 새로운 음악은 어떻게 해도 옛것이 더이상 관심을 끌 수 없었기 때문에 일군의 뮤지션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모여들면서 탄생한 것은 아니다. 옛 스타일은 잘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여전히 ‘유사 이래 가장 대규모의 음악 비즈니스’였다. 상호 연관성 있는 일군의 뮤지션들의 의식적 노력으로 새로운 재즈 스타일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 새로운 스타일은 서로 무관한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뮤지션들의 악기와 마음속에서 형성되었다. 40년 전의 뉴올리언스처럼, 민턴스 플레이하우스가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재즈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는 젤리 롤 모턴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모던 재즈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1940년대 어떤 뮤지션의 주장도 엉터리다.

 이 새로운 스타일은 결국 비밥(bebop)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단어는 당시 그 음악에서 가장 인기 있던 음정인 감5도 음의 입소리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비밥이란 말은 누군가가 이 음정을 노래하려고 할때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것은 비밥의 대표적 연주자 중 하나인 트럼피터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가 비밥이란 용어의 기원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다른 재즈적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 용어의 어원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감 5도는 비밥-또는 밥(bop)이라고도 함-에서 가장 중요한 음정이 되었다. 그때까지 이 장치는 일찍이 1920년대에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윌리 ‘더 라이언’ 스미스가 즐겨 사용하던 패싱 코드(passing code)나 특별한 화음 효과로 활용된 적은 있었지만, 실수 또는 ‘잘못된’ 소리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초기 재즈 형식의 편협한 화성적 기초가 지속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이제 그것은 스타일 전체의 특징이 되었다. 10년 혹은 12년 후에 감 5도는 전통블루스의 감3도, 감7와 더불어 블루 노트(blue note)의 하나가 된다.

 민턴스 플레이하우스에 모여든 가장 중요한 뮤지션들은 피아노의 텔로니어스 멍크(Thelonious Monk), 드럼의 케니 클락(Kenny Clarke), 기타의 찰리 크리스천(Charlie Christian), 트럼피터 디지 길레스피와 알토 색소폰의 찰리 파커(Charlie Parker)였다. 루이 암스트롱이 전통 재즈의 천재였듯이 찰리 파커는 모던 재즈의 진정한 천재였다.

 이 뮤지션들 중 한 사람인 크리스천은 모던 재즈의 창시자들 중 하나일뿐더러 스윙에서 그 발전의 기초를 잡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개척자 그룹은 스윙의 마지막 세대이면서 동시에 비밥의 선구자였다. 그리고 거의 모든 악기에는 그 악기의 비밥 개척자가 있었다. 트럼펫의 로이 엘드리지, 피아노의 클라이드 하트(Clyde Hart), 테너 색소폰의 레스터 영, 베이스의 지미 블랜턴(Jimmy Blanton), 드럼의 조 존슨(Jo Jones)와 데이브 터프(Dave Tough), 기타의 찰리 크리스천이 그런 개척자들이다.

 그 당시 청중에게 비밥의 특색 있는 사운드는 때때로 멜로디를 토막 낸 것처럼 보이는 빠르고 신결질적인 프레이즈로 여겨졌다. 불필요한 음은 모두 배제되었다. 모든 것이 고도로 집약되었다. 어느 비밥 뮤지션의 말처럼, “뻔한 것은 모두 배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음악적 속기이며, 재빨리 쓴 몇 개의 기호로 정연한 관계를 설정하는 속기록을 읽듯이 주의 깊게 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임프로비제이션은 곡의 처음과 마지막에 유니즌(unison)으로 제시된 주제를 기본형으로 하여, 보통 두 개의 관악기-대개 트럼펫과 색소폰(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가 그 원형이다)-로 연주된다. 이 유니즌만으로-임프로비제이션이 시작되기 전에도- 새로운 사운드와 새로운 음악적 자세가 드러났다. 음악 심리학자들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Ode to Joy)”와 그 9번 교향곡 앞부분 1악장의 주 동기(main motif)에서 북아프리카 베두인(Bedouin) 음악과 아랍권의 합창곡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이든 그 유니즌을 신호로 보았다. “들어라, 이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바이다. 우리가 말한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다. 너희는 우리와 다르며 아마도 우리와는 반대 입장일 것이다"

 당시의 전위적인 비밥 사운드의 영향력하에서도, 많은 재즈계 인사들이 이 음악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활용하지 못했다. 단호하게 그들은 한발 물러서서 재즈의 기본 형식을 지향했다. ‘쉬운(simple)’음악이 필요했다. 뉴올리언스 르네상스-혹은 이른바 ‘리바이벌’-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 리바이벌은 재즈의 뿌리-오늘날까지 모든 형식과 모든 시기의 재즈를 지탱시켜주는 그 전통-의 소리를 재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리바이벌은 흑은 뮤지션들이 외면하는 단조롭고 진부한 ‘전통’재즈로 진행되었다)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전통 재즈가 합리적인 표현 형식으로 각인된 생존해 있던 뉴올리언스 재즈 뮤지션들을 제외하면, 중요한 흑인 뮤지션이 딕시랜드 리바이벌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아마추어들은 종종 딕시랜드의 상업화에 대항했으나, 그들 자신이 프로페셔널한 입지를 획득하게 되면서 철저하게 그 제물이 되어야 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파리의 생제르망드프레(Saint-German-de-Pres)에 있는 ‘재즈 브와트(jazz boite)’(일종의 프랑스식 재즈 클럽)가 전통 재즈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곳은 실존주의 철학의 요새였다. 그러나 곧 젊은 실존주의자들은 20세기 초의 태평스럽고 걱정 없는 생활 태도를 드러내는 음악보다는 동시대의 불안에 그들의 철학이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보다 현대적인 재즈 형식에 경도되었으며, 그 운동의 중심지는 영국으로 이동되었다. 이 나라에서 딕시랜드 콘서트는 로큰롤 가수들이 보여주는 것과 똑같은 상업적 노력과 성공이 수반되었다. 

 지금까지 뉴올리언스 리바이벌과 비밥은 당시 재즈 팬들에게 서로 대조적으로 비쳐진 것처럼 극단적인 정반대의 입장으로 서술되었다. 오늘날 - 실상은 1960년대 프리 재즈의 출현 이후 - 젊은 감상자들에게 이 대비는 더 이상 의미를 잃게 되어서, 이런 양극단은 서로 간격을 좁혀가고 있다. 그들에게 찰리파커는 루이 암스트롱과 마찬가지로 재즈 전통의 일부분이다.

 비밥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빠른’,’신경질적인’, ‘멜로디의 토막’, ‘암호’, ‘조급한’ 같은 용어를 써왔다. 그러나 현재 음악계에서, 1940년대 재즈 대부분은 젊은 청취자들에게 완벽한 고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늘날의 젊은 비평가와 감상자들은 이 전개 과정을 본보기로 삼아 극단적인 용어와 개념을 적용하는데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비밥의 신경과민에 대한 반응으로 재즈의 종말 또는 음악의 종말까지 예단한 비평가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터무니없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신경에 거슬리는 큰 소리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40년이 넘게 지난 현재, 우리는 비밥을 창조한 위대한 뮤지션들의 말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 중 유일하게 맥스 로치(Max Roach)만이 현재 음악계의 중심에서 아직도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현대적인 타악기 그룹과의 활동, 세실 테일러(Cecil Taylor), 앤소니 브랙스톤(Anthony Braxton), 달러 브랜드(Dollar Brand), 아치 셰프(Archie Shepp) 같은 뮤지션과의 듀오 콘서트, 스트링 콰르텟(string quartet)과의 협주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 다른 비밥의 아버지인 디지 길레스피는 여전히 비밥 스타일의 창작활돌을 하고 있다. 나머지 뮤지션들은 예술적으로 경직되어 있거나 사망했다. 대부분 심신의 질병이나 헤로인,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다른 예술가들이 겨우 성장을 시작할 나이인 자신들의 사망 시점에, 그들은 창작의 절정기를 이미 넘긴 상태였다.

 비밥 뮤지션들을 스트라빈스키(Stravinsky)나 쇤베르크(Schoberg), 피카소(Picasso), 칸딘스키(Kandinsky), 또는 샤갈(Chagall) 같은 유럽의 창조적인 인물들과 비교해보자. 그들은 고령까지 장수했고, 죽을 때까지 창작활동을 했으며, 온 세계가 그들을 존경하고 찬양했다. 그러나 비밥의 창조적 뮤지션들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요절했는데도 누구 한 사람 그것에 대한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지 않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재즈 아티스트들이 사회에 대해 치러야 하는 대가처럼 보이며, 그 사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이 음악을 매우 강력하고 인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렇게 조기에 경직되거나 요절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훨씬 더 극찬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1970년대 말에 몇 년전만 해도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비밥 리바이벌을 맞이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비밥은 재즈에 있어서 고전적 현대성의 구체적인 증거가 되었다. 전체 젊은이들이 이 음악을 연주했는데, 1990년대 초에는 그전보다 훨씬 더했다. 그들은 선배들처럼 심신쇠약으로 고통 받거나 헤로인으로 인해 요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 리바이벌은 찰리 파커 사후 30년, 버드 파웰의 최초 발작 이후 40년, 비밥 트럼피터 패츠 나바로(Fats Navaro)가 그의 26번째 생일 직후에 사망한지 35년 후에 일어난다.


발췌 : 재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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